[기고] 가장 기본적인 위기에 대하여

 

 

위기에 관한 담론은 바로 그 위기에 대한 담론을 통해서 위기현상을 타개하는 역설을 동반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위기를 외치고, 매체를 통해서 인구에 회자되면, 대중들은 오히려 그 위기의 대상에 열정적으로 호응하는 현상이다. 요즈음 끝없이 제기되는 인문학의 위기 또한 유사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인문학의 부흥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점에는 인문학 관련 서적으로 넘쳐나고 그 중 몇 권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간다.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서는 앞다투어 인문학 관련 강좌를 개설하고 있고, 지역별로 독서모임이 활성화되어 인문학 관련 서적들을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 등 여러 측면에서 인문학은 위기라기보다는 부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이 이렇게도 뜨거운데 왜 끝없이 인문학의 위기론은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가. 인문학 위기론의 시작을 더듬어 보자면 그것은 바로 학문의 전당이라고 일컬어지던 대학의 인문학 관련학과 구조조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12개 학교의 철학과가 폐지되었고, 적지 않은 어문학 계열의 학과들이 폐지되거나, 문화 콘텐츠 같은 이름의 학과로 통폐합되었다. 이런 현상에는 정부의 책임 또한 크다. 정부의 대학 평가 및 지원정책의 중요한 기준을 취업률이라는 실용적인 잣대를 우선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거기에 호응하여 대학은 교육기관의 탈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자본증식을 위한 이익단체라는 숨겨진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 이런 현상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현상은 가속화되어, 대학을 인수한 기업이 자본논리에 맞추어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학의 구조조정을 단행하기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의 과잉과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논리에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중요한 가치는 오로지 자본획득이 되었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삶의 질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며, 경제 발전만 국가가 지향해야 할 지상목표로 기능하고 있다. 개인의 노력이 사회의 공공적 이익과 행복하게 일치하는 시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이상사회로서 인류의 무의식에 작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의 추구마저 사라져 버렸다는 절망적 인식이 가능할 정도로 세계는 경제논리에 함몰되어 있다. 그 속에서 개인들은 끊임없이 배제와 차별, 억압의 위험에 내몰리고 있으며,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추구하며, 자본과 권력이 아니라 공공선을 추구하는 인문학은 도무지 쓸모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인문학의 위기는 그러나 인문학의 폐기 또는 실용적 학문으로의 대치현상을 불러 온 것이 아니라, 다시 인문학의 부흥이라고 할 만한 현상으로 새롭게 나타났다. 그것은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 인문학의 무쓸모의 쓸모라는 본질적 기능이 아직 배태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진보와 발전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도구로 기능한다면 쇠퇴이며 퇴행이라는 것을 근래에 자주 일어나는 비극적 사건들에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세계는 진보해야한다. 그러나 인간 중심이라는 인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특히 새로운 성장을 꿈꾸는 도시일수록 이 요구는 간절할 것이다. 인문학 위기론에서 새롭게 일어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증명일 것이다. 노자는 없음의 쓸모에 대해서 수레의 예를 들어 말한 바 있다. 수레의 바퀴살이 한 곳의 바퀴통으로 모인다 하더라도 그 통이 비어있지 않으면 수레로서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그 비어 있는 통과도 같다. 새로운 도시의 진정한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새겨야 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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